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이 맥락을 잘 표현하고 있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보신 슬픔은 그분의 마음 안으로, 자신 안으로 들어와 그분의 슬픔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분께서는 그 모든 슬픔을 감당하셨으며, 우리의 모든 슬픔들은 하나의 메아리가 되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애통은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슬퍼하는 무리의 편이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을 홀로 두어 고독 가운데로 내모는 일입니다. 우리는 골고다의 고독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해 기도하셨나요?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해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하셨나요? 우리는 그 모든 일들이 모든 이들을 위한 사역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부단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름 없는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군중은, 그리고 무리는 모든 이들의 이름을 제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구체적인 이름으로 부르시고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특별히 비난하거나 꾸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과 강한 결속을 이루시고 이를 통해 그들을 향한 자신의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슬픔만을 보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제거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 거둠
우리의 슬픔은 우리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해결하셨습니다.
거둠 기도
우리를, 우리의 모든 존재를 끌어 안으시는 주님, 당신의 은혜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