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은 대가들에게 기대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 그저 느낌만이 아니라, 지성과 능력을 모두 요구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분은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최고 수준의 사고와 행동을 포함합니다. 이 사랑은 종교적인 감정을 의미하지 않으며, 영원을 찾고 구하는 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자기 존재 전체를 하나님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이 요구를 기꺼이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혹은 선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요구에 필연적으로 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을 저 사랑의 요구에 일치시킬 때,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우선하여 관심을 기울이면 우리 삶에 다른 색깔을 지닌 감정과 행복이 깃듭니다. 이 느낌과 행복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로 훌륭하고 깊고 풍요로운 사랑 안에 있으며, 때때로 위대한 아름다움과 강렬함을 지닌 자연 안에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느낌과 행복은, 목표로 추구되지 않고, 그저 부수적인 특징으로 보여집니다.
영적 혼인의 참된 목표는 '끊임없이 일하는 것, 일하는 것'이라고 성녀 테레사는 말합니다. 많은 동료 수녀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특히 기존의 쉬운 길에 안주해오던 보수주의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녀와 뜻을 같이 하던 동료들은 저들을 게으른 고양이라 불렀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사랑의 교리를 종교적 경험에 곧바로 적용함으로써 성 테레사는 영적 삶의 이상을 마련했습니다. 그녀가 정초한 영적 삶의 이상은 16세기 봉쇄수녀원에서 그러했듯이, 오늘날 복잡하게 얽힌 사회질서 속에서도 여전히 타당합니다.
사랑은 행동의 원인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사랑은 우리의 의식적 행위와 무의식적인 행위를 불러일으키고 그 방향을 설정하며, 결과로 이끕니다. 어머니는 불가항력적으로 아이의 안녕을 위해 행동하며, 야망이 있는 사람은 성공을 추구하며, 예술가는 자기가 마음 속에 지닌 어떠한 상을 표현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이 모두가 행위가 사랑에 이끌려 결과로 향한다는 증거입니다. 종교적 경험은 더 크고 더 포괄적인 결과를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종교적 경험은 영원함을 향한, 끊임없이 생성되는, 최고 수준에서 사용될 수 있는 사랑의 살아있는 힘을 드러냅니다. 복종하는 행위, 고통에서 의미를 찾는 것, 자기존재 전체와 행위를 일치시키는 것, 이 모두는 저 초월적인 성취를 위한 것입니다. 이 넓은 사랑은 영원한 것들과 올바르게 접촉하고, 특정하고 찰나의 것들을 포기하는 행위를 모두 가능하게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 안에, 이 행동들을 통해서 사랑은 모든 인류의 행위와 일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행동들 안에, 그 행동들을 통해서 사랑은 그 영원한 결말을 찾고 발견합니다. 온전히 살아있는 영혼은 고귀함을 올바르게 자기 안으로 들여와야 합니다. 사랑은 이를 위한 가장 강력한 매개입니다. 사랑은 행위의 요소를 통제하며, 의지와 욕망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두 가지가 서로 일치를 이루게끔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