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위치의 줄리안은 말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아주 작은 것을 보여주신다. 내 손바닥에는 한 움큼의 헤이즐넛이 있다. 나는 이해와 사고의 눈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것이 무엇일까?' 그러면 대개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이 안에 창조된 전부가 있다.' 이 작은 것 안에서 나는 세 가지 특징을 본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셨다는 것, 둘째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랑하신다는 것, 셋째 하나님께서 그것을 계속 있게끔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줄리안 성인이 자신의 신앙고백 첫 문단에서 하는 말입니다. 불의와 탐욕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이러한 통찰을 가지고 살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악으로 인식하는 수많은 나쁜 성향들, 어리석음과 자기애에 협력한 직접적인 결과로 보이는 수많은 비참함과 실패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불평하고 혐오할 기회를 주며, 절망에 빠지도록 유혹합니다. 줄리안은 다시 말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 불완전함으로 혹은 불완전함 때문에 모든 면에서 손상되고,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며, 상호 파괴로 유지되는 자연 질서에 대해 생각합니다. 자연 질서는 많은 수의 해로운 동물들과 전염성이 있는 동식물들을 포함합니다. 자연이 지닌 매력적이고 수긍할 수 있는 측면에 대해서는 감상적이고 신학적으로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연현상이 당혹스럽고 적대적인 면모를 보일 때 차분하고 정화된 시선으로, 넓고 사심 없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아래에 놓인 본질적인 신성함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꺼리는 것까지를 포함하여,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창조하셨습니다. 자비하신 창조주의 사랑 곁에 서는 것, 그 모두를 창조주를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신성함에 다가가는 길입니다. 성 프란시스는 하나의 완전함만을 가진 채 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치른 대가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을 사랑했던 저 열정적이고 인내심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찰스 다윈 또한 보잘 것 없고 작은 생명들에 지대하고 헌신적인 관심을 지녔습니다. 그는 그 생명들의 이용가치보다도, 생명 그 자체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그리스도인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성취했습니다. 기도하는 삶이란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든 피조물들을 깊이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 자비를 베풀기 위해 작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피조세계의 경이로움 안에서, 그것이 넌지시 가리키는 생명이신 하나님, 만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