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관조한다는 것은 경건한 몽상에 사로잡혀서 달아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관조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자기를 내려놓고 겸손히 집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삶이 지닌 두렵고도 떨리는 신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각의 신비들은 삶의 깊은 진실과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영혼의 소명과 능력을 우리 각자에게 가져다 줍니다. 그리하여 이 신비들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삶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릅니다. 이 신비들은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색깔들로 갈라질 것이나, 하나님의 거룩한 하얀 빛을 볼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한 교회라 해도 막상 밖에서 보면 그저 칙칙하고 둔탁하며, 매력적이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여기에 훌륭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고는 하는데, 알아볼 수 없군." 이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바깥 세계를 뒤로하고 내면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우주의 모든 빛이 창문을 통해 흘러 들어와 그 색과 아름다움과 의미로 우리를 적십니다. 우리가 결코 꿈꿔보지 못한 것들, 언어의 경계 너머에 놓여 있는 사랑스러움이 펼쳐집니다.
꼭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차리지 못하며, 우리 밖에서 오는 그분의 계시와 영원한 진리, 아름다움처럼 우리 주님께서 펼쳐내는 사랑스러움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합니다.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은 언제나 요점을 놓치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외벽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면의 시선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내면의 시선은 기도와 기억, 예배와 사랑으로부터 옵니다. 제대가 있는 곳, 희생이 있는 곳, 친교의 삶, 하나님꼐 자신을 내려놓는 그 모든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계시를 우리는 참되고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 내면의 시선이 머뭅니다. 늘어선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듯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에 있는 다양한 행동들과 국면들을 봅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하여 빛이 들어오듯, 하나님의 순수한 빛이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영원과 실재가 이 인간적인 차원 안에 주어졌습니다. 그 성당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 끊임없이 샘솟는 아름다움으로부터 신선한 선물을 받는 것, 창문들로 들어오는 하나님의 빛을 더욱 깊이 응시하는 것, 그것이 무상의 비밀입니다.
노르위치의 줄리안은 <계시>의 마지막에서, 그녀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빛, 생명, 그리고 사랑'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는 힘, 우리를 신선한 활력으로 이끌고 지극한 신심으로 채우는 것도 우리의 흐릿하고 공허하며, 희미한 내면의 삶과 완전히 반대되는 저 '빛, 생명, 그리고 사랑'입니다. 우리는 빛, 생명, 그리고 사랑을 얻기 위하여 침묵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보화를 내면으로부터 관조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