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온전한 기도의 삶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기간과 깊이를 생각해봅시다. 어떤 면에서 기도는 우리 삶을 창조하고 지탱하는 사랑과 우리를 연결시킵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온 생명으로 퍼져 나가는 사랑의 열린 통로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다른 면에서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겸손하게 깨닫게 하고 우리를 빚어내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우리의 삶을 맞춰가도록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상황을 고려할 때, 기도의 세계에서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은 하나님과 대등하게 우리의 목소리를 높여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거대한 교향곡에서 작은 부분을 맡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보다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고 있다면 그 때 우리는 보다 신중하게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웅대한 음악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웅대한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며, 저 음악에서 우리의 작은 멜로디가 차지하는 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조세계가 지닌 일치에 관한 진리는 우리를 보다 작은 관계와 이어주는가 하면, 보다 거대한 관계와도 연결 짓습니다. 그 진리는 우리를 가족의 일원으로, 어느 사회질서의 일원으로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모두 그 세계를 섬기는 청지기입니다. 창조세계는 너무나 풍요롭고 다양하기에 그 세계에 담긴 가능성들을 고갈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신중한 선발과 선택, 포용과 배제, 선호하는 것들과 혐오하는 것들, 인종에 대한 편견, 계급에 대한 편견, 그 모든 것이 한 분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는 그저 하찮아 보일 뿐입니다. 만물은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자신의 존재를 갖습니다. 이렇게 어버이와 같은 사랑의 활동인 창조는 끊임없는 경이로움을 자아냅니다. 창조가 보여주는 경이로움은 지속적이고 다채로우며, 보이지 않게 창조하시는 사랑에 우리가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다른 피조물들을 판단하기에는 우리가 가진 것은 너무도 보잘 것 없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우리가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자비만큼이나 협소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의 내적 삶과 외적 삶이 실재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일치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로부터 제기되는 이 모든 요구에 대해 보다 아파하며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이렇게 될 때에만 그리스도교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한 분 하나님의 활동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영혼에 있는 기도실과 부엌 또는 기도실과 서재 사이에 단단한 벽을 세웁니다. 그러나 성령의 창조적인 활동은 삶 전체를 꿰뚫으며 우리로 하여금 온갖 종류의 방식으로 이를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좁게 생각하는 탓에 눈에 보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필요와 계기들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저 보이지 않는 경험들에 등급을 매기기는 좋아하되 그 진가는 의심합니다. 테레사 성인은 말했습니다. "나는 요리를 하고 꽃을 심는 가운데 아주 쉽게 그분을 발견했다." 또한 엘리자베스 르쇠르는 말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의무가 다른 모든 것보다도 우선한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신앙적 실천들을 끊임없이 점검하기 위해 자신이 생각하는 의무들에 스스로를 옭아맸습니다. 그녀는 그물처럼 얽힌 삶을 꿰뚫고 들어오시고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활동이 지닌 총체성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