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수록 상황을 넘어서는 성령의 낯선 힘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이 떠들썩하게 선포되거나 하는 일은 좀처럼 없지만, 그래도 성령은 언제나 이곳에 계십니다. 당신의 풍요로움과 자유함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 속에 들어오십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구성하는 사건의 흐름을 뒤엎으시고, 이를 통해 우리의 영혼을 다듬어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지닌 온기는 우리 삶을 꿰뚫고 들어와, 그 삶을 바꾸고 북돋아줍니다.
이렇게 삶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힘을 드러내시는 일반적인 활동을 우리는 막연하게 '섭리'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끊임없이 삶과 어우러지면서 우리를 압박하고 움직입니다. 하지만 보통 우리는 이를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마치 자기장이 그 안에 흩어져 있는 철가루에 영향을 주듯이, 우리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우리 인생 전체를 규정합니다. 가끔 하나님의 섭리가 삶의 표면 위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물망처럼 엮인 사건들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그분의 절묘하고도 끊임없는 사랑과 힘을 목격하며 깜짝 놀랍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윌링크 박사가 쓴 <거룩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섭리와 활동 사례들을 모아 놓았을 때 드러나는 장엄함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활동에 관한 일련의 증거들은 신약성서에 두툼히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대하고 중요한 사건에 개입하실 때도 있는가 하면, 결혼식에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포도주를 채우는 등의 소박한 일에 나서실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절망적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는, 폭풍을 적절한 순간에 잠잠케 하시고, 감옥 문을 열어 택한 종들이 안전하게 위험을 헤쳐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이 편안함을 가져다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한 복음의 핵심은 사건에 개입하시고 뒤엎으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현존, 인격적인 에너지, 즉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왜 이것을 낯설게 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건 우리가 무뎌져 있으며, 답답할 정도로 상상력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보잘것없는 인간 세계에서만 보더라도, 이윤을 많이 남기기 위해 거대한 산업 전체를 조직하는 완벽한 주인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그 주인은 모든 일꾼의 안녕과 이익을 위하여 일꾼들에게 상대적인 자유를 주고, 세세한 부분까지는 간섭하지 않되 정해진 선에서 공장이 운영되게 합니다. 그를 위해 일하는 일꾼들은 언제든지 개인적인 어려움이나 갈망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는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필요한 곳이라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심지어는 공장에 사는 고양이에게도 관심을 기울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한 인간도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시며 절대적인 위엄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와 참새를 함께 돌보시며,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개입하신다고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면, 우리는 이를 시적인 표현으로, 모순으로, 미신으로 받아들입니다. 측량할 수 없이 거룩하신 분의 능력은 우리 세계로 들어와 상황을 바꾸고 조정합니다. 그 능력을 믿기에는 우리는 너무 좁은 관념 안에 갇혀 있고 어리석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