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클래식 공연장에 가서 정작 공연은 듣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프로그램 책자를 주의 깊게 살핍니다. 책자에 담긴 내용도 신뢰합니다. 곧 연주될 음악이 무척 좋다며 감탄을 일삼기까지 하면서도 정작 음악이 울려퍼질 때 그의 귀에 들리는 건 단 한 구절뿐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의 자기표현인 이 우주 안에서, 우리는 작게나마 일정 부분을 감당하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꼭 저 사람처럼, 하느님의 웅장한 교향곡이 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관념이 우리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일상에서 겪는 풍부한 경험은 저런 세계와 음악이 있음을, 우리가 그 음악의 작은 부분을 이루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를 할 때 우리는 보편적인 충동에 이끌려 우리 자신 너머에 있는 능력을 구하고 그 권능에 호소합니다. 이 때 우리는 높은 곳을 알아차립니다.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사랑과 용기, 위대한 소명과 값진 희생, 인격적 변화의 원천인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기도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신비입니다.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합리주의와 자연주의는 끊임없이 기도에 의혹의 시선을 보내지만, 여전히 기도는 삶에서 그 고유한 힘으로 우리를 움직입니다. 심지어 아주 조잡하고 순진해 보이는 기도조차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계 너머로부터 오는 힘은 때로는 터무니없고 매력적이지도 않은 모습으로 들어와 우리를 당혹케 합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힘이 이 세계가 가진 일시적인 질서를 뒤흔듭니다. 종교적 부흥의 역사를 공부하며 공감했던 이는 이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모습은 산 정상이 갑작스럽게 드러나는 광경과 같습니다. 동시에, 황량한 들판에서 벚꽃이 피어나는 순간처럼 보입니다. 아름다운 협주곡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감각 너머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다가오듯,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저 아름다움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가 내포하는 고통 또한 의식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줄 아는 성숙한 이는 고통이 닥쳐올 때 유전이나 환경, 기회, 스스로 세운 계획, 우연을 탓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는 결정적인 만남도 있고, 예기치 않게 길이 열리는 순간도, 그 길이 닫히는 순간도 있습니다. 무언가 말할 수밖에 없는 사건을 겪을 때도 있고, 편지를 쓰지 않고서는 못 배길 순간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능력은 보이지 않게 이끄는 힘처럼, 인격적이고 살아 있으며, 자유롭게, 때로는 우리의 의도와 욕망에 반하는 방식으로 우리 삶의 자리에서 활동합니다. 그 힘은 우리가 가야 할 방향으로 우리를 밀어 넣고, 되어야 할 모습으로 우리를 빚어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