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1절은 14절 하반절부터 바울이 베드로를 질책한 말이 이어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그 대상을 갈라디아인들에게 옮겨 가고 있는 건지 알기가 어려워요. 바울의 안디옥 사건 회상이 결국 갈라디아인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기에 15-21절이 어떤 대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인 대상은 갈라디아인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게다가 15-21절은 2,000년이라는 시간동안 갈라디아서 해석에 있어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구절로 가득 차 있어요. 하지만 각 구절은 하나같이 압축된 문장이면서 은유적 표현과 더불어 중요한 신학 개념이 별다른 설명 없이 등장하고, 전치사의 의미가 워낙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서 해석이 쉽지가 않아요.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들으면 불쾌할 수 있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해요. 유대인들은 바른 삶을 살아가는 지침이 되는 율법을 받았지만, 이방인들은 율법을 받지 못했기에 자연스럽게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예요. 그러나 16절부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의 귀에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는 주장이 시작 돼요. 바울뿐만 아니라 베드로 역시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짐'이라는 핵심적인 믿음에 대해서 동의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베드로는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반하는 행동을 안디옥에서 했고, 바울은 이를 위선이라고 말하면서 매우 강하게 비난하고 있어요.
베드로에게 화를 내며 꾸짖는 2장 16절은 갈라디아인들의 어리석음을 일갈하는 바울의 한탄 사이에 있어요. 2장 15절부터 3장 내내 '피스티스(π́ιστις)'와 '율법의 행위들'이 대조되는데, 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밥상 교제 문제로 불거진 안디옥 사건,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예루살렘 방문 때 벌어졌던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할례 문제에 있어요. 달리 말하자면 후대에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로 유명하게 된 바울의 언설이 원래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내의 지위 문제와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율법 준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해요.
바울은 16절에서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행위구원론에 대해서 반박하는 게 아니에요.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살아야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주장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신념을 철저하게 부수고 있어요. 율법의 행위들로 사람이 의롭게 여겨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만을 중요하게 보세요. 이미 E. P. 샌더스(E. P. Sanders)라는 학자가 고대 유대교가 율법 준수를 통해 구원을 얻는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매우 강력한 논증(『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참조)을 통해서 밝혀냈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행위를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어요. 유대인들은 개신교와 크게 다르지 않게 하나님의 은혜를 두고두고 강조했어요. 하나님의 비상응적인 은혜, 선행(先行)하시는 은혜가 이스라엘 정체성의 토대였거든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답게 살라는 지침을 주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율법을 지켰어요.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지위를 유지한 거고요. 즉, 우리가 유대교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선입견과는 달리, 율법 준수는 하나님의 택하심의 수단이 아니었던 거예요. 오히려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감사 표현의 수단이었던 거죠.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마틴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잘못 읽어 낸 영향이라고 볼 수 있어요.)
율법의 행위들은 인간의 자력 구원의 시도나 율법의 완벽한 준수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를 가리키는 게 아니에요. 율법을 핵심으로 두는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율법의 가치를 존중하며 그에 따라 사는 걸 의미해요. 그리고 이는 할례나 안식일 준수, 그리고 음식 규정 준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요. 그래서 학자들은 율법의 행위들을 '율법 규정들'이라고 번역하며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율법의 규율들을 일컫는 표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요. 그래서 율법의 행위들은 '토라로 규정되는 삶의 방식' 정도로 번역하는 게 자연스러워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는 어떤 뜻일까요? '피스티스(π́ιστις)'는 거의 예외없이 '믿음'이라고 번역되어 왔어요. 하지만 그리스어 사전에서 이를 찾아보면 이 단어는 신뢰를 주는 것, 신실함, 신뢰, 충성, 증명, 믿음, 보증, 정직 등 무척 다양한 뜻으로 사용돼요. 특히 믿음보다는 관계 형성의 바탕이 되는 신뢰나 신실함이라는 뜻으로 더 자주 사용되었어요. 또한 '그리스도의'에는 영어로 'of Christ'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충성으로 직역할 수 있어요. 'love of God'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사랑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일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는 그리스도의 신실함 혹은 그리스도를 믿음이라는 뜻이 가능하게 돼요.
되게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이 해석은 칭의라는 주제에 대한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쳐요. 칭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기반하는지, 아니면 우리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기반하는지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바로 이게 신약학계에 널리 알려진 피스티스 크리스투(π́ιστις Χριστου̑) 논쟁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두 해석 모두 일리가 있으나 동시에 두 해석 모두 부자연스러운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중요한 건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정확히 무엇을 믿는 것인지 이 짧은 문구가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지만 말이에요.
덧, 오늘은 여기서 마칠게요. 내용이 너무 중요한데 논증의 길이가 길어서 내일 다시 한 번 살펴 볼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