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과 밥상 교제를 나누는 행위가 '유대교와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했어요.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의 밥상 교제에서 물러난 행위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차별한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유대적 생활 방식을 따르도록 강요한 거예요. 바울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베드로를 나무랐어요. 권위를 인정 받았던 베드로가 그렇게 행한 것은 바울의 눈으로 볼 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지위를 낮춰 보았다는 의미이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처럼 살아야만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가 "이미 유죄판결 받았다" 혹은 "경멸받았다"고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그리고 바울은 이로써 다시 한 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수제자로 유명한 베드로마저도 복음의 진리를 위반해서 정죄를 받는데, 하물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복음의 진리에 대한 설득을 하고 있는 거죠. (반복해서 나오고 있지만 두려움을 자극한다는 말을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설득은 논리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감정이나 권위에 대한 호소나 두려움 자극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하는 일이니까요.)
안디옥 사건에서 읽어 낼 수 있는 복음의 진리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주님 안에서 정결하고 의로운 백성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음(faith in Christ)' 혹은 '그리스도의 신실함(faithfulness of Christ)'에 달려 있어요. 사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지는지 아니면 예수께서 보이신 신실함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지 그리스어 문장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워요. 이게 바로 '피스티스 크리스투(π́ιστις Χριστου̑)' 논쟁이라고 불리는 거예요. 우리는 그동안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롭게 여겨진다고 믿었는데, '그리스도를 믿어서'라고 기록된 구절이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의미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롭게 여겨지는 것인지, 그리스도께서 신실하셔서 의롭게 여겨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거예요. 이게 최근 신약학의 눈부신 연구의 결과예요.
같은 믿음 아래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없어요. 이것이 복음의 진리예요. 그러나 복음의 진리는 마음으로 간직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돼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진리에 따라 걸어야 해요(14절). 걷는다는 표현은 살아 내고 행동한다는 의미인데요. '바르게 걷는다'는 말과 '바른 견해'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어요. 달리 말하자면 바른 견해는 바른 걸음과 분리될 수 없다는 거예요. 복음의 진리는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거죠.
바울은 "믿음은 사랑을 통해 구현되어야 하며, (복음의) 진리는 순종의 대상이다"라는 논증을 이후에 등장하는 본문에서 매우 강조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며, 믿음 외에 그 어떤 것도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으세요. 따라서 출신과 관계없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신분을 가져요.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 주심으로 나타난 열매이고, 그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돼요. 그리고 그 정체성이란 우리의 믿음이 바른 행동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러한 믿음으로 사는 게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는 거예요. 복음은 이렇게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