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에 방문했고, 이는 계시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달리 말하자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 무리가 불러서 간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방문한 것도 아니에요. 앞서 이야기 나눈 것처럼 바울은 자신의 독립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요. 바울이 예루살렘 방문기를 이 편지에 적은 것은 자신의 복음이 다른 사도들의 복음과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그리고 예루살렘 방문 시 불거진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할례 문제에 대해 바울 자신이 압력에 굴하지 않고 할례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고 알리기 위해서예요. 바울의 이러한 태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취해야 할 모범이고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암묵적으로 권고하고 있어요.
갈라디아서의 핵심 문제는 '공동체 내에서의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지위 문제'예요. 이 문제의 본질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배타성과 유대-중심주의이고요. 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유대적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야 하나님 백성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예루살렘에 방문했을 때 유대인 정체성의 핵심인 할례 문제가 불거졌고 바울은 그들에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전달한 거예요.
그런데 바울이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건은 '강요'예요. 바울은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하는 행위를 맹렬히 비판하는데, 마치 강요하지 않고 할례를 권유하는 건 별 문제가 없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강요의 문제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어요. 바울이 강요의 문제에 격하게 반응한 이유는 다음과 같아요. 로마 제국은 명예와 수치라는 가치 아래 작동되던 사회였어요. 노예(4절)라는 단어는 수치스러움의 극치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조차 꺼리던 표현이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양식을 강요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에 비해 우월하다는 전체를 내포하고 있어요. 바울은 바로 유대인들의 이러한 선민 의식을 비판했던 거고요.
이방인과 유대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바울에게 이 사실은 복음의 진리와도 같았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가 같은 신분이므로 서로 강요할 권리가 없고 자유로워요. 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以信稱義) 논쟁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해요.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겨진다는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믿음 외에 어떤 인간적 가치와 규율도 고려하지 않으신다는 선언이고, 따라서 할례로 대표되는 유대인의 삶의 방식도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에 있어서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않아요.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사도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던 것처럼 말해요. 더 나아가 자신의 사도적 임무가 베드로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대표 사도인 것 같이 바울 자신은 이방인 전도에서 베드로와 맞먹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요. 우리는 이것이 1인칭 회상이라는 점, 그러니까 바울 자신의 관점으로 진술된 내용임을 주목해야 해요. 바울은 자신의 의도에 맞게 예루살렘 회상기를 기술하고 있어요. 이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서술이 아니고요. 그는 사실 이 이야기를 통해 갈라디아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중이에요.
바울은 자신이 베드로와 동급의 사도이며 이는 바울 자신의 복음의 권위를 재천명하는 기능을 해요. 베드로만큼의 대표 자격을 지닌 이상 자신의 복음을 붙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넌지시 전하고 있는 거예요. 2장 9절에서는 바울이 자신과 예루살렘 사도 그룹과의 완전한 의견일치와 상호인정을 이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에게서 기원했으며 이는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즉 바울의 복음은 하나님과 사도들에게 이중으로 인정받은 셈이에요. 그래서 바울의 복음은 유일한 복음이고 유일한 권위리를 지니고 있으며, 누구라도 이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게 바로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