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안디옥이나 예루살렘에 있는) 권위자들에게 의존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어요.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소명 사건과 자신의 복음 전도 활동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복음이 가지는 신적 기원을 강조하며 자신을 변호하고 있어요. 이 본문에서 나와 있는 대부분의 구절들이 바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독립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요. 그는 특히 예레미야나 이사야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어요. 이방인의 사도라는 직무와 그가 선포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직접, 바울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획하고 의탁하신 거라고 말이에요. 그렇기에 바울의 복음은 이방인들이 순종해야 할 절대적 권위를 지닌 메시지예요.
유대교(13절)는 이 맥락에서 유대 종교라는 하나의 종교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에요. 유대인들의 신앙과 율법을 따르는 생활, 그리고 이에 대한 충성심을 의미해요. 특히 바울을 유대인들 중에서도 바리새파 노선에 있었고요. 조상들의 전통(14절)도 같은 맥락을 의미하고 있어요.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만남 이후에 모든 유대적 가치들을 폄하하고 있어요. 특히 교회를 핍박했던 시절을 회상한 후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리스도와 만나게 된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을 받을 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더 나아가 그 선물은 매우 문제 있는 사람에게도 주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바울이 살던 세상에서는 선물을 주고 받는 관습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어요. 현대인들과는 달리 그 당시 사람들은 선물을 제대로 주기 위해서는 선물 받을 사람을 신중하게 골라야 했어요. 그러니까 선물은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었고, 그렇게 선물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받은 선물의 가치만큼 되갚아야 했어요. 그런데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에 선물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바울에게 그리스도라는 선물이 주어진 것은 매우 충격적이고 사회적 가치 체계에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었어요.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 계시되었어요. 이 말은 2장에서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라는 유명한 고백으로 재현되고, 이후에 갈라디아 교인들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재형성되기를 바란다는 바울의 소망으로 나타나기도 해요.
바울은 예루살렘으로부터의 독립성에 대해서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어요. 바울의 전략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독립된 지위를 말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자신의 복음이 인정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며 권위의 문제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어요.
결국 1장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아래와 같아요. 자신이 전하는 복음만이 유일하고 참되며, 그의 복음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차이가 없어요.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벗어나면 누구든지 저주의 대상이 돼요. 그리고 바로 이 내용은 갈라디아서 이해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될 거예요. 복음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기쁜 소식이면서, 동시에 조금이라도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순종의 대상이기도 해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에 저주를 걸어 두었고요(?).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전에 이방신들을 섬겼던 이방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개념이었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