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들이 시켜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사람이 맡겨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임명하심으로써 사도가 된 나 바울이, 2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믿음의 식구와 더불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3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습니다. 5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편지의 첫 문장에 유난히 "-가 아니요"라는 부정적인 표현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바울은 이를 통해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과 그의 사도직에 대한 권위가 이 편지의 제일 중요한 주제라고 말하고 있어요.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기원이 사람들로부터가 아니라 부활하신 분의 위탁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이라고 강조하고 있어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기원이 하나님이라면, 그가 전하는 복음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게 된다는 말이 되니까요.
4절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위해 그 자신을 "바치셨다"고 말하고 있어요. 왜 바울은 흔히 십자가 사건을 표현하는 "죽으셨다"는 말이 아니라 "바치셨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걸까요? 이 표현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바치신 행위가 가지는 선물로서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거예요. 이는 절대로 무효화될 수 없으며 무효화해서도 안 돼요. 바울은 바로 여기에서 의로움이 율법을 통해 올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어요.
바울에 따르면,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어요. 바울은 편지의 서두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토대로 신학(구원의 문제)과 윤리(어떻게 현재의 악한 세대를 거슬러 살아가야 할까?)를 하나로 엮어서 말하고 있어요. 믿음은 삶으로, 특히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일이에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에요.
복음의 왜곡에 대항하다
6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몇몇 사람이 여러분을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8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하였지만, 이제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그 당시의 서신들은 서두에서 감사의 말을 덧붙이는 게 관행이었어요. 그러나 바울은 이를 생략한 채 자신을 압박하는 물음을 제기하고 있으며, 심지어 감사를 전하는 대신 저주를 두 번(1:8-9)이나 덧붙이고 있어요. 그래서 갈라디아 사람들은 관행과는 전혀 다른 편지의 서두를 보면서 매우 놀랐을 거에요. 물론 이는 정확하게 바울이 의도한 것이었고요.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전복적인 구약성서 해석과 독특한 은혜와 율법 이해, 새로운 기반 위에 쌓은 윤리적 가르침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요. 바울은 이를 전하기 위해서 청자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자신의 편에 서게 하고자 해요.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르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단해요. '은혜를 통해 부르신 분을 빠르게 버리고 떠난 행동'이라고요. 바울은 자신이 선포한 복음과 다른 가르침을 '다른 복음'이라고 말했다가, 이내 혹시 있을 수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또 다른 복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요.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인간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그리스도의 복음(1:7)'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을 휘저은 이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킨 자들이라고 말해요.
그러나 변질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의 설득에 갈라디아 성도들의 마음이 움직였다는 거예요. 아마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갈라디아인들을 돌이키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거예요. 설득이라는 건 명료하게 사실만 전달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감정이나 권위에 호소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인정과 인간 관계 등 여러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설득에 영향을 끼쳐요. 다른 복음을 전한 자들은 갈라디아 성도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던 방법은 바로 감정에 호소하고 청중들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방법이었어요. 그래서 초반에 저주를 두 번이나 퍼부은 거기도 하고요.
저주에는 다른 의미도 있는데요. 고대인들은 성스러운 법이나 책, 그리고 보물과 같은 것들에 저주를 걸어서 타인이 침해할 수 없도록 했어요. 고대인들은 그러한 저주가 실제로 작용한다고 믿었고요.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도 마찬가지로 그가 선포한 저주에 의해서 보호되고 유지된다고 생각했어요. 바울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했던 거죠. 복음은 은혜롤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인데, 저주는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고 은혜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곧 저주예요.
생각해 볼 점
1. 성서는 때로 적용해야 할 내용을 제시하지 않을 때도 있어요. 우리는 말씀 묵상에서 적용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적용점을 제시하지 않는 구절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꼭 적용점을 찾아야 할까요?
2. 두려움에 의해서 하나님을 더욱 더 잘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두려움을 통해서도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할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