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신 땅에 있는 성읍을 점령하였을 때에는, 숨쉬는 것은 하나도 살려 두면 안 됩니다. 17 곧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명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가나안 땅에서 사는 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어요. 그곳이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고 그곳에 들어가는 게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라고 믿었던 거예요. 문제는 가나안 땅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거예요. 자신들이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 땅에 사는 원주민들을 내쫓아야 했던 거죠.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 모두를 전멸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요. 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다고 '믿었다'"고 말씀 드렸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어요. 그 당시에 그들에게는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시대를 넘어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은 결코 아니에요. 하나님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바라시는 하나님이세요. 이렇듯 성서는 성서 기자들의 인식론적 한계가 반영되어 있어요. 그렇다고 성서 기록이 다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고요. 우리는 손가락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그 손가락이 지시하는 달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요. 그들의 한계를 걷어 내고 그 가운데 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면서 성서를 읽어야 해요.
그 당시의 윤리와 문화를 살펴 읽기| 창 11:29, 16:1-2, 25:1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1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서 한 몸을 이루는 것, 돌보고 섬기는 것, 연애 감정과 설렘 이후의 날들에도 다른 사랑의 언어를 서로에게 건네는 것 등 우리가 이해하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이 있잖아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 모든 사랑의 언어를 한 사람과만 나눈다고 믿고 그게 옳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아브람은 사래를 아내로 맞이했고, 하갈을 몸종으로 맞이했으며, 그두라를 후처로 맞이했어요. 성서는 아브람이 두 사람 이상의 아내를 맞이한 데에 대해서 아무런 가치 판단도 하지 않고요. 우리의 기준에서는 문제가 되는데 성서의 기준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거죠. 이는 그들은 일부다처제를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우리는 일부다처제를 용인하지 않는 데에서 기인합니다. 우리는 그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들이 오늘날에는 문제가 되고, 그 당시에는 문제였던 일들이 오늘날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 내용들을 마주하곤 해요. 이건 시대적 차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렇기에 이러한 내용들을 대하는 바른 태도는, 성서가 전하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옳은 기준이라고 믿지 않는 것, 그 내용이 그리스도교적 윤리에 대해서 말한다고 일반화하지 않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교회들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의 관심사는 그 교회에 상황에 따라 발생한 특정한 문제에 대한 권면인데, 거기에서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윤리를 도출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으니까요. 우리는 그 당시의 윤리나 문화의 더께를 걷어 내고 그 가운데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며 성서를 읽어야 해요.
그 당시의 시대적 필요를 살펴 읽기| 레 11:7-8
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 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어떤 음식을 먹어도 되고 어떤 음식은 먹으면 안 된다는 규례가 있는 이유는, 특정한 음식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위생상 문제가 있거나 더러워서가 아니에요. 성서에서 이렇게 짜잘한(?) 부분들에 대해서 규제하는 건 특정한 목적을 지니고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구분된 사람들이 필요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러한 선택의 토대 위에서 그들에게 자신의 뜻을 말씀하셨어요. 문제는 (사실 모든 사람들이 그렇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당시 주변 종교와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 중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별 차이가 없는 일들도 있었지만, 완전이 세속의 가치나 정신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와 정신을 세워야 하는 부분도 있었어요. 그렇게 부단히 서로 영향을 받은 민족과 민족에게 구별되고 남다른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단절되어야 했어요.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서 주변 민족들이나 그들의 문화, 종교와 단절이 필요했던 거예요. 어떤 음식에 대한 규례가 있는 건 그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에요. 채식주의자와 가까워지지 않는 방법 중에 하나는 육식만 하는 삶을 사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다양한 음식 규례들은 주변 민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구분했고,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깊이 잠긴 백성들이 세워질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규례나 윤리적 문제들 안에는 이러한 차원도 있다는 것을 헤아려 보아야 해요. 위에서 말씀 드렸던 대로 그러한 내용들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건 이런 차원에서 어리석어요. 심지어 그리스도 이후에는 구분된 한 민족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서로가 하나라는 신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자리잡게 돼요. 타자에게 개방하고 타자와의 차이를 좁히고,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정하며 하나가 되는 게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뜻이에요. 우리는 그 당시에만 필요했던 내용들을 잘 헤아리며 오늘날 우리를 향한 뜻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성서를 읽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