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34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시는가?' 내지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하는 질문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정한 장소에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다' 혹은 '특정한 장소에 계신다'고 믿었어요. 모세는 떨기나무라는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성소 시절에는 지성소라는 '장소'에 계신다고 하나님이 믿었으며, 언약궤가 있는 '장소'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었어요. 이 모든 이야기들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장소에 계시며, 그곳에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다는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 인식과 신앙을 나타내는 성서 구절이에요.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장소'는 결국 성전으로 수렴하게 되었는데요. 문제는 주변 나라들의 침략을 받으면서 그 성전이 무너지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신다고 생각했는데, 성전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신다고 믿었을까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라는 독일의 신학자는, 이스라엘의 성전이 무너지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신앙이 성장하게 된 계기라고 말해요.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성전에만 계신다고 믿었지만, 성전이 무너지고 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며,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고 믿게 돼요. 성전을 잃었기에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깊어지게 된 거예요. 그리고 이를 드러내는 성서 구절이 위에 나오는 이사야서 40장 5절의 말씀이에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이를 볼 거라는 말은 변화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구절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출애굽기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계시는 분이라고 믿어서는 안 돼요. 성서 안에서도 이미 하나님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드러나는 구절들이 있는 걸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성서 전체를 일관적으로 바라보는 틀을 가지고 개별 성서 구절들을 읽어야 해요. 흔히 이야기하는 숲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 드리자면, 숲 전체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개별 나무들을 봐야 한다는 거죠.
다른 성서 구절을 토대로 그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며 읽기| 요 20:24-25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는 흔히 의심의 상징으로 여겨져요. 부활하신 주님을 마주한 다른 제자들이 그 사실을 전하니까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하고 말해요. 도마도 이해가 가요.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신앙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우리도 도마와 같이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도마를 소비해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손목에 있는 못 자국과 옆구리에 난 창 자국을 보여 주세요. 흥미로운 건 주님께서 도마를 나무라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살펴 볼 수 있어요. 한 번 예수님을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예수님의 복장을 떠올려 보세요. 아마도 소매는 손등까지 길게 내려 오고 씨스루나 구멍이 뚫리지 않은 상의를 입고 계시지 않나요? 맞아요. 그 당시의 복장 문화를 살펴 보면 아마도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은 가려져 있을 거예요. 예수님의 손목에 난 못 자국과 옆구리에 난 창 자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드러내는 결정적인 표지예요. 하지만 그것은 가려져 있었어요. 오히려 도마의 의심을 통해, 도마와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소매를 걷고 상의를 들어 올리며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 주셨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보이게' 된 거죠. 도마의 의심을 통해서요. 누군가는 도마의 의심을 나무라지 않으시는 주님을 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의심 없는 신앙의 확신이 아니라 의심하는 신앙의 정직함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이러한 묵상은 성서 구절을 다른 구절을 통한 지식과 그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며 묵상했을 때 주어지는 거예요. 상상력이 묵상을 돕는 중요한 도구인 건 이 지점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그리스도교 신학의 내용들을 토대로 읽기| 롬 8: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 구절은 그 자체로도 너무 은혜롭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의 내용들을 토대로 읽으면 더욱 더 풍성한 의미를 가져요. 사랑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서로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달리 말하자면 죽은 자와는 사랑할 수 없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관계의 단절이자 동시에 사랑의 불가능을 의미해요. 만약에 우리가 죽어서 무(無)로 돌아가게 된다면 마찬가지예요. 그 누구와의 관계도 불가능하고 그렇기에 그 누구와의 사랑도 불가능해요.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죽음조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랑의 종말이기도 하지만 부활은 사랑의 영원함을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해요. 그 무엇조차, 모든 가능성을 앗아가는 죽음까지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이 구절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와 부활을 비롯하여 다양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내용들을 개별 구절에 적용하면 더욱 더 풍성한 성서 읽기를 할 수 있어요. 무언가와 무언가가 만나 새로운 무언가가 되는 것처럼, 성서 구절과 성서 구절이 만나서, 성서 구절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들이 만나서 새로운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내용들을 토대로 개별 성서 구절을 읽어야 해요.
"성경을 살펴보면, 성경 안에서도 시대나 저자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욱 더 체계적으로 구성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전체적인 성경의 맥락과 그리스도교 신학의 체계 안에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