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해설
14일에 보내 드린 성서 톺아보기(위 사진 참고)에서 제가 말씀 드렸죠?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뒤에서 밝혀질 거라고요. 오늘이 바로 그 복선을 해결하는 날이에요. (와!) 야곱은 마치 신하가 왕에게 궁중 예절을 갖춰 하듯이 인사를 하고 있어요. 에서는 야곱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을 법한데, 그리고 야곱은 그런 에서를 두려워 할 법도 한데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가 봐요. 둘은 서로에게 달려 가서 서로를 맞이하며 포옹하고 입을 맞추고 함께 울었어요. (문득 왜 사람들은 '입을 맞췄다'는 말을 그 시대나 그 장소의 인사 문화로 생각하며 무작정 따르지 않는데, 다른 본문들은 문자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는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TMI였습니다!)
뒤이어 에서는 야곱의 가족들을 보면서 인사를 하고 야곱은 가족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다고 말해요. 여기에서 야곱이 가족들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셨다고 말하는 건,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어필하는 거예요. 마치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나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 <밀양>에 나오는 이야기처럼요. 비호감이지만 성서 기자는 야곱에게 죄를 묻고 있지 않아요. 성서는 윤리나 미덕에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 당시와 현재의 도덕적 기준이 다른 것도 고려해야 하지만, 다윗의 간음이나 야곱의 일부다처를 절대 용서받지 못할 죄로 여기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그들이 잘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서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부족한 존재로, 그렇기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존재로 그리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성서의 관점은 늘 넘어지는 인간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어요. 넘어지는 것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는 거죠.
에서는 야곱의 선물 공세를 보면서 안 그래도 된다고 이야기하고, 야곱은 형님께 은혜를 입었으니 이 선물을 꼭 받아 달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야곱의 입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이 나옵니다. 10b절은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야곱이 형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혹은 형님 기분 좋으라고 한 그 말이 흥미롭게도 바로 하나님을 보는 방법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다른 이들을 통해서 볼 수 있어요. 그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다른 이'의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어요.
성서의 진술에서 중요한 내용들은 고통 받는 이들을 통해서 주어졌어요. 아파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조금 길지만, 오늘은 세월호에서 세상을 떠난 창현이 어머니, 최순화 집사님의 이야기를 인용해 드릴게요. 공교롭게도 부활주일과 세월호 3주기가 겹쳤던 2017년 4월 16일, 세월호 음악회에서 하신 최순화 집사님의 기도입니다. 여기에서도 최순화 집사님을 통해 같은 사실을 볼 수 있어요.
"창조주이시며 전능자라고 불리우는 당신께 기도 드리는 것 쉽지 않습니다. 3년 전 우리 아이들의 살려달라는 마지막 기도를 외면했었으니까요. 당신께 등 돌리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 당신이 계시더군요. 더 이상 울 힘조차 없어 그저 멍하니 앉아 바다만 바라보던 팽목항에도, 차가운 시멘트바닦에서 하늘을 보며 잠을 청해야 했던 국회에도, 내리 쬐는 땡볕을 피할 그늘 하나 찾기 어려웠던 광화문에도, 하수구 냄새에 시달려야 했던 청운동사무소에도, 침몰 지점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동거차도에도, 그리고 병든 몸을 이끌고 세월호가 누워 있는 목포신항에도, 당신은 계셨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몰랐던 분들이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다가와서 안아주시며 같이 울어주시는 따뜻함에서 당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 아이들이 살려 달라고 당신께 기도할 때 그 기도 좀 들어주시지, 왜 우리 아이들이 없어진 지금 모르는 사람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나요?
고난주간이면 우리 죄를 대신해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신 그 사랑에 감격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를 묵상하고 죄 짓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 고통에 가서 닿으려고 노력했었지만 우리 아이들이 없어진 이후엔 그런 노력, 하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이 고난주간이고 십자가와 세월호는 동일시 되고 있으니까요.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신 십지가와 수학여행 가던 단원고 아이들을 태우고 가다가 침몰 당한 세월호를 동일하게 여기는 것이 불경스러우신가요? 2천 년 전 오늘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세 시간 동안 어둠이 덮치고,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다는 기록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아픔을 느끼게 해줍니다. 같은 아픔을 나눌 수 있는 분이 하나님 당신이셔서 다시 당신께로 향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으면서도 자신을 못 박은 사람들이 몰라서 저지른 일이라며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 모습을 닮기란 불가능해보이지만, 그렇게 기도하신 예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가장 잘 섬긴다는 큰 교회들은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하기보다는 애써 외면하거나 오히려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처럼 모르고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쌓아 올린 바벨탑이 너무 높고 견고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저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저들을 불쌍히 여기실 분은 하나님 당신밖에 없습니다. 저들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예수님이 짊어지셔야했던 십자가의 고난이, 십자가의 용서가 저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세요.
낮은 곳으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당신의 임재와 사랑을 기다립니다. 팽목항에서, 국회에서, 광화문에서, 청운동사무소에서, 동거차도에서, 목포신항에서 만났던 당신을 닮은 사람들이 오늘 이 곳에 가득합니다. 부디 이들에게 청결한 마음을 주셔서 당신을 보게하시고 세미한 당신의 음성이 들려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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