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해설
야곱은 형 에서와 만날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가족들과 소유한 모든 것을 먼저 보내고 홀로 남아 있었어요. 아마도 형을 만나게 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복잡한 심경을 가지고 있던 야곱은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해요. (갑자기?) 문제는 24절부터 26절에 등장하는 사람이 하나님이신지, 아니면 천사인지 성서가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는다는 거예요. 또 28절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말은 '초인적인 힘'을 의미하기도 해요. 어쩌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앞둔 야곱은 위태로운 길목 위에서 이와 같은 신비하고 자연적인 힘을 경험한 게 아닐까요? 조금 더 살펴 봐요.
야곱도 씨름 쪽 선출(선수 출신)이었는지 최대 하나님, 최소 초인적인 힘과 겨뤄서 지지 않았어요. 결판이 나지 않자 상대가 그 순간에 반칙을 씁니다.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친 거예요. 그러나 야곱은 그 사람을 끝까지 보내주지 않았어요.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지면서 놓아줄테니 자신을 축복해 달라고 요구해요. 옛 생각에 축복이란 힘을 넘겨 주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이 존재는 야곱에게 자신의 힘 중 일부를 넘겨 주어야 했어요. 그리고 뒤이어 야곱의 이름을 다시 지어 줍니다. 이제 너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말해요. 바로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이스라엘인 이유를 드러내는 이야기인 거예요.
이스라엘 다운 건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은 끈질기게 하나님께 은혜를 요구하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께 축복을 구하기 위해서 씨름하고, 부상을 당했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게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의 정체성을 여기에서, 바로 이 이야기에서 찾는 거예요. '하나님을 끈질기게 구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답게 만드는 일이에요.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죠? 이스라엘이라는 상징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를 뭐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끈질기게 구하는 사람들, 그게 우리가 되어야 해요.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 그러니까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이름 짓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말해서는 안 돼요. 성서 내부적 근거로는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따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기 때문이고요. 신학적 근거로는 우리가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은 영이셔서 물리적인 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 말은 씨름도 불가능하다는 거고요. 제가 오늘의 이야기를 건네 드리면서 바로 이 사실이나 역사가 아니라, 바로 이 이야기라고 말한 이유는 여기에 있어요. 우리는 오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정체성에 담긴 유대인들의 민족 설화를 읽은 거예요. 구약성서는 특히 걷어 내야 할 더께가 많은 책이에요. 돌아 오는 신앙 큐레이팅을 얼른 하면 좋겠어요. 그때 나누는 이야기가 해석학적 이야기는 아니지만, 무엇을 걷어 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건네 주는 것 같아요. 더 깊이 이야기 해 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