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문자가 아니라 그 문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파악하는 거예요. 마치 손가락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는 것과 같달까요? 성서가 기록되었던 시대와 인간 기자의 한계, 그리고 그 배경과 문화라는 더께를 걷어내고 우리는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해야 해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거예요. 성서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신앙하고 있는지 헤아리는 일 말이에요. 오늘의 본문도 새롭게 이해할 만한 내용이 많이 등장하고 있어요. 한 번 살펴 보자고요.
말하는 뱀은 없어요. 말하는 뱀은 이야기의 설정에 불과해요. 초기 유대교와 그 영향을 받은 신약성서는 뱀을 악마의 상징으로 이해했어요. 뱀이 좀 생긴 게 교활하게 생겼고 꺼림칙한 게 있잖아요? 그래서 창세기의 기자가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고발하는 데에 있어서 뱀을 등장시키는 것만큼 강력한 효과를 가지는 상징은 없었을 거예요.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유혹이라는 서사로 인간의 죄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데, 유혹을 하려면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 정도일 거예요. 말하는 뱀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게 전부예요. 그 이상도 이하도 없고 거기에는 역사적 사실도 없어요.
<성서 톺아보기 |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 나눴어요. 성서가 말하는 참 인간은 더 큰 능력을 가짐으로써 인간성이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부족하고 한계가 있어서 신을 의지하며 사는 존재예요.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존재가 아니라, 더 큰 능력을 가짐으로써 그 누구도 의지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존재예요. 오늘의 본문은 인간이 그런 존재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게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입니다. 여러분이 많이 들어보셨던 원죄가 바로 자기-중심성을 지시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게 죄이고, 그게 바로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중심적인 존재라는 것 말이에요.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언젠가 해결되어야만 하는데요. 우리는 복음서에 이르러야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느낌 오시죠?)
오늘의 본문은 말하는 뱀과 아담과 하와라는 인물을 등장시켜서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고발하는 내용이에요. 중요한 것은 "성서가 말하는 인간은 자기 중심적인 존재이다."라는 명제이지, "아담은 실제로 존재했는가?" 혹은 "말하는 뱀은 가능한가?"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더 나아가, (하와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주었기 때문에) 죄의 시작은 여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건 얼토당토 없는 일이에요. 오늘의 본문은 실제로 여성을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생각하는 사유의 근거로 쓰이기도 했어요. 불행히도 그 이유는 성서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고요. 여러분, 성서를 잘못 읽는 게 이렇게나 해롭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서를 좀 제대로 읽어 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