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비판했는가?'하는 질문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 답변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1세기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을 거예요. 바울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유대-중심주의나 배타주의를 겨냥하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했던 사람들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서 율법의 행위들을 비판한 거예요.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맥락에서 저주하는 말과 더불어 할례를 절대로 받으면 안 된다(must not)고 주장하며 갈라디아인들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자신의 적대자의 영향력에서 빼 내고자 했어요. 절대로 안 된다는 말은 갈라디아서에만 등장하는데 이 말은 신학적인 맥락이 아니라 편지의 수신인의 상황의 맥락에서 쓰여진 말이고요.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을 어리석다고 비판하며 그들이 악한 주술사에 의해 홀렸다고 말하고 있어요. 바울은 자신의 대적자를 깎아 내리고 있는데 이는 고대의 연설가들이 자주 사용하던 기법이었고요. (동시에 바울은 1장 10절에서 "내가 주술사겠느냐? 하나님을 설득하게?"라고 말하며 자신이 주술사로 비치는 것을 부인했어요. 이 말에서도 자신의 적대자들을 주술사인 것처럼 들리게 말하고 있고요.) 뒤이어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얻은 영적 유익에 있어서 율법의 행위들이 기여한 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어요. 이는 경험에 기반하여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고요.
그러면서 바울은 이 지점에서 새로운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데 , 바로 갈라디아인들이 영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어요. 여기에서 영이라는 말이 등장했다고 삼위일체의 성령을 떠올려서는 안 돼요. 왜냐하면 삼위일체 교리는 훨씬 후대에 발전되었기 때문이에요. 바울은 영을 '그리스도'라고 말할 때도 있고 '그리스도의 영'이나 '하나님의 영' 혹은 그냥 '영'이라는 표현을 동의어로 사용했어요. 그에게 영은 하나님의 힘을 드러나게 하는 매개체이자 인간을 변화시키는 주체이기도 해요. 바울은 대담하게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바로 영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영은 오경에 등장하지 않는데도 말이에요.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영을 받았기에 육에 의지하는 게 틀렸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뒤이어 바울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꺼내 오고 있는데, 그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자의적으로 인용하고 있어요. 아브라함 이야기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할례받은 일(창 17:9-27)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바울은 창세기 17장의 이야기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언급을 삼가고 있어요. 바울은 창세기 17장으로 인해서 자신의 주장이 흔들릴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적대자들이 아브라함의 할례를 따라 할례를 강요했을 가능성이 있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꺼내 들은 것처럼 보여요. 사실 '피스티스'와 '의롭다고 여김을 받음'의 관계가 창세기 15장 6절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3장과 4장을 아우르는 뚜렷한 주제는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인가?'하는 거예요. 그리고 바울은 7절에서 '피스티스에서 비롯된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못을 박아요. 바울은 자신의 이방인 사역이 "모든 민족이 너로 인해서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그리고 그 말씀이 자신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하고 있어요.
10절은 다양한 번역본에서 잘못 번역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개역개정이나 새번역 본문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의 행위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번역했지만,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의도와 목적이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어요. 따라서 이 구절은 율법의 완벽한 준수가 저주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바울은 신명기 27장 26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저주를 통한 설득을 이어가며 율법의 행위들을 받아 들이려고 하는 갈라디아인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고 있어요.
그 다음 구절은 성서 안에 등장하는 모순처럼 보여요.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의롭다고 여겨지지 않는다고 말했으면서(11절) 왜 바울은 레위기 18장 5절, 즉 "그 계명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로 살 것이다(12하반절)"라고 인용했을까요? 이는 모순되는 주장이지 않나요? 바울의 주장을 살펴 보면 하박국 2장 4절이 참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레위기 18장 5절은 제 아무리 오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하박국 말씀을 통해 레위기의 내용을 무력화하는 거예요. 12절에서 "율법은 피스티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레위기의 주장을 격하시키는 말이기도 하고요.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한 구절을 절대시하면서 한 구절을 격하하는 방식은 성서 해석이나 수사학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어요.)
13-14절의 논리 역시 명료하지 않은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저주에 속량하셨다고 말하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목적을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도 미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어요. 유대인이 저주에서 속략되어야 이방인에게 아브라함의 복이 전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아마도 갈라디아서의 첫 부분부터 바울의 논증에 중요하게 등장했던 저주의 문제와 관련해서, 그러니까 지속해서 갈라디아인들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 짐작해 보아야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