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형이 정확히 언제부터 행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어요. 오늘의 본문을 살펴 보면 적어도 구약성서가 기록되었던 시대에는 십자가에 매달아 사람을 죽였던 것이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죽인 후에 그 사람을 나무에 매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얼마나 큰 범죄를 저질렀으면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그의 시체를 사람들 앞에서 전시했던 것일까요? 나무에 매달리는 일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그래서 이를 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요.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이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 이유는 바로 오늘의 본문이에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나무에 달린 그리스도는 저주를 받은 사람'인 거에요. 그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이겠어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가 구원자라니.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나무에 달린 자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래서 오히려 신명기의 구절이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되게 하는 구절이라고 말했어요.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저주는 자기-중심적인 존재인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저주예요. 그렇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거리낌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저주를 자신의 존재에 짊어지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그리스도예요. 할렐루야.
전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냐?"고 말한 내용이 그의 버릇 없음이 아니라 그가 구약성서에 정통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구절이라고 말씀 드린 적이 있죠? 그리고 그가 구약성서에 정통했기 때문에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으로 받아 들였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죠? 성서 읽기는 이렇게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더 깊은 의미를 지니게 돼요. '성서 톺아보기'를 통해서 성서의 중요한 구절을 헤아려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앞으로도 더 깊이 알아 보자고요.